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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3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주택관리사 햇병아리 시절에는 천지 구분을 못했다. 당시에는 자격증만 있었지, 관리에 대한 체계도 없었다. 그저 주택관리사 각자가 경험을 공유하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던 시절이었다. 장미꽃이 활짝 피기 전이었던 것 같다. 대한주택관리사협회에서 추천받았다며 라디오 방송국에서 나를 찾아왔다. 비교적 작은 키에 빈틈이 없어 보이는 남자였다. 당시 관리사무소장들은 임기 1년을 채우는 이가 거의 없었다. 전문가라고 자부하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법보다 현실의 경험이 우위를 차지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에게 주택관리사란 직업은 생소했다. 운전면허 정도의 자격증이라고 인식하던 시절이었다. 대주관에서는 남자보다 여자인 내가 출연하는 것이 직업에 대한 홍보도 되고, 관리사무소장의 업무도 다양하게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방송 소재도 적당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나로 인해 유능한 다른 소장의 이미지를 흐릴까 싶어서다. 제대로 답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아는 것만 대답하겠노라고 하고는 인터뷰에 응했다.“관리사무소장님들 중에 여자분은 혼자죠.”그는 신기한 듯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트 단상
김화순 주택관리사/울산 중구 동덕현대3, 4차아파트
호수 1273
2022.07.12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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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은 65% 이상이 아파트에 거주하고 70% 이상은 연립, 빌라 등을 포함해 공동주거생활을 하고 있다. 올해로 나는 한 번도 쉬지 않고 10년차 아파트 관리사무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나는 소장을 하기 전 여러 개의 직업을 거쳤다. 2년 정도는 철학관을 하다가 아내와 큰딸의 권유로 운명처럼 이 직업을 갖고 근무하고 있다. 20년 이상 오랫동안 근무하고 계신 선배 소장님들에 비하면 무슨 이야기가 있겠나 싶기도 하다. 나는 아파트 단지 근무가 어떻다는 이야기를 적기 위함만이 아니다. 사람을 가장 많이 상대하는 직업 중 하나인 아파트 소장은 감정노동을 하는 직업이기에 철학적 사고로 아파트를 관리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적어 본다. 처음 근무한 아파트는 200세대도 안 되는 조그만 단지였다. 경리도 기사도 없이 혼자서 1년간 근무했다. 다시 400세대에서 경리, 기사와 함께 3년을 넘게 근무했다. 이어 650세대 되는 곳에서 4개월밖에 근무하지 못한 적도 있다. 또 경리, 기사에 전기과장이 있는 500세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근무했으며 현재는 750세대에서 근무한다. 다섯 곳을 10년 동안 옮겨 다닌 셈이다.우리 소장들은 이렇게 아파트 근무지를
아파트 단상
김태현 주택관리사/경남 진해석동주공아파트
호수 1272
2022.07.06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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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소장 : “우린 자치관리라 재계약 걱정이 없어.”D소장 : “좋겠다.”U소장 : “석 달에 한 번 동대표 회의를 하는데, 30분이면 끝나.”D소장 : “정말 좋겠다.”U소장 : “대표회장한테 결재받을 필요가 없어. 도장을 내가 갖고 있거든.”D소장 : “엄청 좋겠다.”U소장 : “민원은 붙박이 직원들이 다 알아서 해. 내가 나서서 할 일이 없어.”D소장 : “엥? 그럼 무슨 재미로 일하냐?”U소장 : “거짓말하는 재미로 일하지, 히히.^^”어떤 사람을 만날 때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일하면서 경험하는 기쁨이나 슬픔, 두려움을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 같은 사람을 만날 때다. U관리사무소장처럼 상대의 입장과 처지를 공감하는 듯한 유머 발휘는 D소장이 속마음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수 있게 해줬다. D소장은 요즘 앞뒤로 압박을 받고 있다. 앞에서는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뒤에서는 위탁관리회사 임원이 찍어누르고 있다. D소장은 얼마 전 입대의 회장이 아파트 소독을 맡은 용역회사에 은밀하게 전화를 해서 엉뚱한 요구를 하는 것을 알게 됐다. 이를 제지했더니 입대의 회장은 결재할 때 예전과는 달리 엉뚱한 트집을 잡고 반복해서 물어보고 또 물어본다. 분풀이한다
아파트 단상
박종식 주택관리사
호수 1271
2022.06.2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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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향남 복사꽃마을7단지 관리사무소에서 근무하기 시작하면서 영주 귀국한 사할린동포 어르신들을 처음 만나게 됐다. 일제 강점기 때 강제징용 당한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서 사할린으로 갔거나 그곳에서 태어났던 이들 중 일부가 지금 조국으로 다시 돌아와 이 땅에 살고 있다. 우리 단지에는 총 51세대 103명이 왔다. 부부 25세대, 자매 혹은 동거인으로 1세대에 2인 거주 조건으로 들어온 26세대였다. 정부가 주거급여를 지원하고 적십자사가 임차보증금 등을 부담한다. 우리 단지는 바람이 강하게 부는 편이다. 입주 당시 공교롭게 복도 새시가 돼 있지 않아서 몇 분이 관계기관에 자주 진정을 넣었다. 관리사무소를 찾아와 민원을 말할 때 러시아 특유의 억센 발음을 강하게 뱉어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다.어르신들은 다른 입주민과 어울리지 못했고 우리 말이 서툴러 사내 방송을 이해하지 못해 무슨 내용이냐고 물었다. 2012년 4월 사할린 동포들을 위한 평생학습마을 사업으로 단지 관리동 3층에 행복학습관이 마련됐다. 여기서 한글 문화수업이 계속 이어졌다. 어르신들은 낮에 컴퓨터도 배우고, 건강체조도 하고, 뜨개질 등의 프로그램에 참석하면서 오르내렸다. 최고 인기강좌는 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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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주택관리사
호수 1270
2022.06.21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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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사무소장 경력이 늘어나다 보니 내가 주변 소장들에게 물어보는 것보다 동료 소장들이 나에게 물어보는 것이 더 많아진 것 같다. 금액이 큰 공사에 맞닥뜨린 소장이 궁금해한다. 몇 마디 거들었더니 그 소장 입장에서는 열쇠가 됐나 보다. 앞으로도 막히는 일이 있을 때 많이 물어볼 테니 멘토가 돼달란다. 내 주제에 멘토는 무슨 멘토, 부드럽게 거절하면서 커피값을 먼저 냈다.이처럼 사양한 것은 멘토 역할을 자임하고도 제대로 역할을 못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 뒤에는 N소장이 있다. 운명적으로 나와 인연이 맺어진 N소장은 긴 세월 지도를 받았음에도 큰 진전이 없다.동대표 선출 과정을 주도하는 것은 선거관리위원회이지만 사실상 소속 위원들은 아마추어다. 동대표 선출 절차와 세부적인 내용 검토는 프로인 소장이 할 수밖에 없다. N소장도 그런 걸 잘 안다. 내가 그때그때 주지시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N소장 또한 몸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동대표를 선출하는 일은 아파트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보다 더 면밀하게 절차에 신중해야 하고 내용을 꼼꼼히 검토해야 한다. 그런 걸 제대로 못 챙기는 바람에 N소장은 지난번에 근무했던 아파트에서 쫓겨날 뻔했다. 고생을 많이 했다.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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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식 주택관리사
호수 1269
2022.06.1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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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근무하는 아파트는 700여 세대로 평범한 이웃들이 어울려 살고 있다. 서울 도심에서 동북 방향으로 경기도와 맞닿은 곳, 산이 가까이 있어 도심보다 공기가 한결 맑고 차다. 지하철 4개 노선과 강릉선이 연결되는 전철역이 도보거리에 있어 사통팔달 교통망을 갖춘 살기 편한 곳이다. 오십 년 전통의 재래시장이 이웃에 있고 주변에 할인마트만 열 곳이 넘어 세일 품목에 따라 알뜰주부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코로나19의 국내 유입 이후 하루 두 차례 방역작업을 해온 지 2년이 넘었다. 입주민 이용률이 가장 높고 손길이 많이 닿는 승강기는 미화여사님이 맡는다. 현관 입구 계단, 지하주차장 계단 손잡이, 주 통행로, 노인정은 경비대원의 몫이다. 놀이터, 운동기구, 쉼터는 점검을 겸해 시설관리팀, 입주민과 외부인 출입이 많은 관리소는 소장, 과장의 몫이다.준공 30년이 넘은 아파트라 주차와 층간소음 민원이 많다. 허용 주차면의 두 배에 이르는 등록 차량으로 주차 문제는 근본적 해결방안이 마땅찮다. 층간소음 문제는 다르다. 건물 층간의 두께가 얇다는 건물 구조상의 하드웨어적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는 소프트웨어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언젠가 층간소음 민원이 접수된 다음 날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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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극
호수 1268
2022.06.09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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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목련이 참 좋다. 활짝 핀 꽃보다 피기 전에 더 예쁜 꽃은 목련이 제일인 것 같다. 몽우리가 너무 예뻐 사진으로 남겨본다. 행복은 어떤 과정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잠시 미소 짓는 그때 그 감정이라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이 가진 것에 기웃거리는 내 눈이 참으로 어리석어 보인다.코로나19로 누구 한 사람이 아닌 모두가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나 혼자만 겪는 일이라면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텐데,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낸다. 조금만 나가면 밝은 빛이 보이는 터널 밖을 희망하며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산다.며칠 전 시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새로운 장례문화를 접했다. 7년 전 시어머니의 장례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많은 사람이 조문하던 과거와는 달리 이번에는 ‘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인사를 드렸다.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니 서로 조심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가족 중에도 코로나에 걸려 참석하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시기다.운구차 기사에 부탁해 아버님이 사셨던 아파트 입구를 한 번 돌고 장지로 출발했다. 아파트 산책로를 좋아하셨다. 예전에는 공원이나 시간을 내어 차를 타고 산책로를 찾아 나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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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희 입주민/충북 청주시 금천뉴타운아파트
호수 1267
2022.05.2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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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려 보니 약 2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비바람과 봄볕의 따스함을 모두 느꼈다. 우연한 기회에 주택관리사라는 라이센스를 접하게 됐다. 남성과 차별되지 않으면서 여성 특유의 끼를 발휘하며 섬세하고 부드러움으로 내 살림 돌보듯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생활을 꿈꾸던 때였다. 여성의 역할이 남성의 보조자 정도로 제한되던 90년도 말이었다.이후 당당히 한길로 걸어왔다. 남성 주택관리사들이 더 많기도 하고 단지 내 시설을 관리한다는 점에서 아직도 남성을 더 떠올린다. 하지만 4차산업 시대를 맞아 남녀 차별은 구시대적 발상일 뿐 성별 구분 없는 직업에 자부심을 갖는다.주택관리사는 직업 특성상 여성 특유의 꼼꼼함으로 공동주택을 책임지고 자신의 역량을 세울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정의 생활을 관리한다는 점에서 가정주부와 유사하다. 특히 아파트에서 낮에는 가정주부와 노약자,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주택관리사는 내 집, 내 식구 대하듯이 성심성의껏 눈에 보이지 않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직장생활을 행복하게 할 수 있으려면 가정에서부터 삶의 질이 개선돼야 하는 것처럼 아파트 입주민들에게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주택관리사들의 소임이다. 주택관리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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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기 주택관리사
호수 1266
2022.05.20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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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님. 그 할머니 때문에 미치겠어요.” 아침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출근하자마자 경리주임이 말한다. 민원인 전화에 시달리다 간신히 전화를 끊은 그의 하소연에 나도 그만 화가 치민다.“주임님. 또 그 집인가? 혼자 사신다는 그 할머니? 방송도 하고 방문도 하고 공고문도 붙이고 원하는 대로 다 해줬는데 또 무엇 때문에 전화했대요?”“엊저녁에 아랫집에서 담배를 피워 냄새 때문에 잠을 못 잤다네요. 아랫집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데 왜 자꾸 아랫집을 의심하고 전화를 하실까?”3개월째 층간소음과 담배 냄새 때문에 괴로우시다며 민원을 하는 할머니와의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경리주임이 안쓰럽다. 일단 무조건 경리주임의 편을 들었다. 민원인이 너무 예민해서 그렇다고 성토하던 순간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차!’ 하며 반성했다.‘가재는 게 편’이라고 무조건 민원인이 너무 예민해서 그렇다고 치부할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진심을 갖고 그분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어떤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을 했는가. 되돌아 보면 그 할머니의 민원 해결을 위해 우리가 한 것이라고는 고작 생활 소음을 줄여달라는 방송과 공고문 게시가 전부였다. 마치 우리는 할 만큼 했으니 더는 해 드릴 것이
아파트 단상
김형근 관리과장/오산태영아파트
호수 1265
2022.05.12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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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주택 관리사무소장은 평범한 직업인이 아니다. 다방면에 달란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드넓은 바다 위에 떠 있는 4만6000톤급 타이타닉호 같은 유람선을 움직이는 선장과 같다. 나는 8만3000톤급 유람선 ‘아름3호’를 책임지는 선장이다. 아침이면 언제나 분주하고 긴장된다. 엊저녁 유람선 고객의 불편 사항 같은 여러 사안을 당직자와 포지션별 선원 22명이 선장에게 보고하고 선조치하는 중요한 시간이다.우리 아름3호는 2009년 12월 20일에 광주광역시 광산구 수완동에서 출항해 현재까지 안전 순항을 하고 있다. 선장은 조타실에서 먼 곳을 바라보며 유람선 내부의 모든 일을 챙긴다. 큰 유람선 구석구석까지 각 시설물을 점검하고 기능 상태를 파악해서 한치에 오차도, 안전사고가 없도록 해야 한다. 멋진 항해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비바람도 맞을 수 있다. 고객과 고객 간의 갈등, 고객과 선원 간의 갈등, 선원과 선원 간 보이지 않는 갈등도 있을 것이다. 유람선 내에서의 갈등은 아름3호 뿐만 아니라 다른 유람선에서도 있는 일이다. 때론 선장의 능력이 한계에 부닥칠 때도 있겠다. 교신을 통해 상부 기관(대한주택관리사협회)에 문제 해결을 요청하거나 다양한 인터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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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규 주택관리사
호수 1264
2022.05.04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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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와 열정이 충만한 곳.’ 바로 우리가 사는 아파트의 모습이다. 편리함과 개인주의라는 달콤한 열매에 취해 공동체와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가 일상화되고, 사적 전유공간에 대한 천착만이 지배하는 아파트 공화국, 이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시골 마을에서 기쁠 때나 슬플 때 이웃 간 인심과 정을 나누는 모습은 아득한 옛날 추억이 된 지 오래다. 아파트 생활로 몸에 밴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해 이웃에 대한 배려와 인내는 사라져간다. 이웃 주민 간 갈등과 분쟁이 날로 증폭되고 때로는 흉포화하고 있는 살벌한 장소가 되고 있다. 층간소음, 주차, 흡연 등 사소한 문제가 주민 간 감정의 격화를 낳고 폭행,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우리 단지는 ‘참꽃 축제’로 유명한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비슬산자락에 위치한 대구 테크노폴리스 일반산업단지 내 국민임대아파트 단지다. 총 1390세대의 대단지로 2016년 2월에 입주했다. ‘나 홀로’ 어르신이 전체 입주민의 70%가 넘고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 주민도 많다. 관리직원은 나를 포함해 23명으로 구성돼 있다. 넓은 단지 면적에 풍부한 녹지율과 함께 인근 비슬산의 자연풍광이 더해 쾌적한 주거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아파트 단상
배종석 주택관리사/대구 테크노폴리스LH천년나무1단지
호수 1263
2022.04.2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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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모임에 나가거나 친구들을 만나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대화의 초점이 자연스럽게 건강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간다. 지인들이 있는 인터넷 대화방에도 마치 모래에 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건강 관련 글들이 많이 올라온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많이 늘어, 여성은 80대 후반에 들어섰고, 남성도 80세를 넘겼다고 한다. 보험회사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100세 시대’라며 노후 보장보험을 많이 권장해 왔지만 이젠 정말로 100세 시대를 앞둔 것 같다.그렇다 보니 예전엔 겪어보지 못했던 질병들이 ‘노환’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친구처럼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다. 그래도 의술이 발달한 덕에 웬만한 병은 일찍 발견해서 잘 대응하면 대부분 극복이 가능하다고 한다.인간이 오래 살면서 찾아오는 대표적인 질환 중에 치매가 있다. 나이가 들면서 후천적으로 기억, 언어, 판단력 등의 인지기능이 감소해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증상을 말한다. 여기엔 ‘노인성 치매’와 중풍 등으로 발생하는 ‘혈관성 치매’가 있다고 한다.치매의 절반 이상이 노인성 치매고, 20~30% 정도가 혈관성 치매라고 한다. 흔히 치매 환자의 고통보다 간병하는 가족들의 고통이 훨씬 크다는 이야기를
아파트 단상
우남우 관리사무소장/부산 해운대센트럴파크
호수 1262
2022.04.19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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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데로 이사하세요?”“텃밭 딸린 농가로 갑니다.”“좋겠습니다! 나이가 적당히 들면 누구든 한번은 꿈꾸는 로망인데, 그 로망을 이뤄서 좋겠습니다.” “아닙니다! 싫은데 억지로 가는 겁니다.”50대 초반의 남자 입주민이 이사 가기 위해 관리비 중간 정산을 하러 관리사무소에 들렀다. 귀농해서 살만한 나이까지 되지 않은 것 같고, 이사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간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나 층간소음 당사자로 윗층 아이들이 뛰거나 걷는 소리를 못 참아서 이사 가는 건 아닌가. 아래층 주민이 너무 예민해서 일상적인 소음발생도 용인하지 못해 이사 가는 건 아닌가. 그러나 나의 예측은 빗나갔다. 이사 가는 사정은 그게 아니었다. 70대 후반 아버님이 아파트 생활은 답답하다면서 흙을 밟고 몸을 움직이면서 텃밭에서 먹거리가 될 수 있는 채소를 심어먹는 농촌생활을 원하셨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버님이 그러시다 말겠지’라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아버님이 같은 소망을 반복해서 간절히 말씀하시는 바람에 안 되겠다 싶어 텃밭 딸린 농가를 구입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하지만 이사 준비가 끝났으니 이사를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입주민은 때늦은 후회에
아파트 단상
박종식
호수 1261
2022.04.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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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온천천을 신나게 내달려 근무 단지로 출근한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자유의 물결을 느낀다. 세상살이의 억압과 구속, 그리고 좁쌀 정도의 가녀린 한 생명으로서의 인간이 느끼는 불확실성의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비로소 해방된다.2년 넘게 계속된 온천천 변의 오수관로 공사도 이제 마무리돼 많은 사람이 오가며 산책을 즐긴다. 청둥오리, 물닭, 가마우지, 왜가리들도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먹이 활동하느라 분주하다. 자세히 보니 청둥오리 몇 마리와 물닭 가족들이 뭍으로 올라와 온천천 변 어린 새싹 유채를 다 뜯어 먹고 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못마땅해 “훠이훠이” 소리치며 쫓아내 보지만 소용없다. 싱싱하고 달달한 유채 맛을 알았으니 그냥 지나칠 리 없다.유채는 뿌리만 튼실하면 줄기에서 다시 순이 나와 3월쯤 시민들이 흐드러지게 핀 노란 유채꽃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유채는 꽃, 나물, 씨앗 기름, 땔감 등등 하나도 버릴 게 없다. 유채 나물 맛을 그 무엇에 비할까. 2~3월에 꽃대가 막 올라온 유채를 솎아서 살짝 데친 후 참기름을 듬뿍 넣고 조물조물 무쳐 유채 향이 그윽한 나물을 즐길 수 있다. 마트에서는 겨울초(하루나)라 이름 붙여 겨울
아파트 단상
지철민 관리사무소장/부산 거제동월드메르디앙아파트
호수 1260
2022.04.05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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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밭에 뒹굴어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좋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도 저 아파트보다는 내가 근무하는 이 아파트가 낫다고 생각하자. 모나게 굴어도 그동안 경험해서 익숙해진 동대표가 럭비공처럼 어떻게 튈지 모르는 새로운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자.이러면서 오래 근무하고 싶지만 3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위탁관리 재계약의 벽을 어렵게 넘는 관리사무소장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넘지 못하는 소장들도 있다. 아예 넘지 못할 것임을 감지한 위탁관리회사에서도 포기하는 심정으로 위탁관리 재계약 5개월 전에 소장을 새로 배치했다. 그가 E소장이다.그런데 E소장은 재계약을 했다. 그것도 전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재계약을 했다. 그러면서도 E소장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밖에서 보기에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쉽게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E소장도 내부적인 갈등과 험난한 과정에서 길이 끝났음을 여러 번 느꼈으나 새로 길을 낸 것이었다. 관리직원들의 급여인상이 포함된 예산안을 통과시킬 때 열성을 다해 어필했지만 먹혀들지 않는 사례가 많다. ‘각 세대가 담배 반값의 돈만 더 내면 관리직원들이 인근의 다른 아파트와 비교해 열등의식을 갖지 않고 더욱 열심히 근무할 수
아파트 단상
박종식 주택관리사
호수 1259
2022.04.01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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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겨울을 뒤로 보내고 드디어 봄이 왔다. 봄 농사가 한해의 결실을 좌우하듯, 봄 조경 역시 아파트 1년 치의 아름다움을 결정한다.봄에는 언뜻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낙엽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아마도 꽤 여러 단지에서 지난해 가을에 수거해 모아둔 낙엽을 미처 다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게 많을 것이다. 공동주택에서 늦가을의 낙엽은 쓰레기로 치부된다. 이를 처리하기 위해 적지 않은 비용과 직원들의 노고를 부담한다. 아파트에서 낙엽은 깨끗이 치워야만 하는 쓰레기의 일부로 여겨진다. 주변에 나뒹굴면 미관을 해치고, 이는 곧 관리 부실로 이어진다. 하지만 낙엽을 쓰레기나 폐기물로만 생각하는 것은 낙엽의 쓰임새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다. 많은 이가 지자체 또는 개인이 운영하는 텃밭사업에 참여한다. 그러면서 천연농약 만들기, 미생물 발효액 만들기, 음식물 찌꺼기로 퇴비화하기, 친환경 무농약 먹거리 강좌 등을 공유한다. 그 유용성을 공감하면서 가족과 함께 텃밭 농사를 준비한다. 아파트 텃밭 사업은 건강한 도시농업과 마을 공동체 활성화 운동으로 연결될 수 있는 매우 바람직한 주민 활동이다. 그렇다면 아파트에
아파트 단상
황덕현 관리사무소장/ 천안파크밸리동일하이빌 도시농업 관리사
호수 1258
2022.03.24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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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주택관리 분야에 꽤 긴 기간 종사해 오면서 관계 법령들도 주택건설촉진법, 공동주택관리령, 공동주택관리법으로 변천하는 것을 지켜봤다. 최근엔 징벌적인 조항들이 많이 증가했다. ‘언젠간 과태료 한 번쯤 맞을 준비를 하고 다니라’는 자조 섞인 얘기도 나누게 된다.주택관리사 직업을 지금껏 가져오면서 ‘생각보다 이 시장이 참 좁다’는 생각도 한다. 부산 시내 16개 구군에 공동주택이 1,200여 단지가 존재해 시장이 넓은 듯해도 ‘참 좁다’는 말이 맞는 말 같다. 능력이 출중한 소장들도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은 바로 현재 자기가 근무하는 곳이란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새 베테랑이 돼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관리사무소장 경력 3~4년의 초보 시절, 모임에 가면 습관처럼 물었다. “입주를 받아 봤느냐?” 당시엔 입주를 받아 본 소장이라야 좀 인정해 주는 분위기였다. 입주 단지로 갈 기회가 있으면 경력 쌓기 차원에서라도 꼭 가 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마침 북구 화명신도시 입주가 시작될 때 모 시행사로부터 제안을 받고 덜컥 수락해 버렸다.입주가 시작되고 보니 첫날부터 포장마차 상인들이 단지 안에 밤새 어떻게 들어왔는지 여기
아파트 단상
우남우 관리사무소장/ 해운대센트럴파크아파트
호수 1257
2022.03.1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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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만 뜨면 코로나19 확진 관련 문자와 서방의 전쟁 이야기, 네거티브를 동반한 선거전 등등. 쏟아지는 부정적인 정보들 속 당신의 마음은 안녕하신지. 같이 살아가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당신의 마음은 평안하신지. 혹자는 지금도 자신의 마음보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한 나머지 스스로를 생채기 내는 일을 반복하며 안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모르겠다. 자존감과 자신감을 분리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타인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혹시 당신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많이들 혼동하는 자존심과 자존감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존심이란 자신의 가치, 능력, 적성 등의 자기평가가 긍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 평가는 자신 또는 소속집단으로부터의 승인을 기초로 발생한다. 실제로 자신의 승인보다는 우리가 소속한 집단의 평가에 매우 많은 영향을 받는다.그에 반해, 자존감이라는 녀석은 자신에 대한 존엄성이 타인들의 외적인 인정이나 칭찬에 의한 것이 아니다. 자신 내부의 성숙된 사고와 가치에 의해 얻어지는 개인의 의식을 말한다. 오롯이 자신의 내부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상처투성이인 세상을 살며 내가 배운 것은 ‘상처를 덜 받도록 나만의 갑옷을 두껍게 하는 방법’이었
아파트 단상
박대란
호수 1256
2022.03.1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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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동백의 계절이다. 꽃들이 자취를 감추고 국화마저 시들 때 찬 서리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동백꽃이 봉긋 피어난다. 진실한 사랑을 알고 싶거든 나를 바라보라고 말하는 듯, 아리도록 서러운 눈빛이다. 그까짓 사랑 때문에 울지 말라는 선홍빛이다. 아니, 사랑을 하려거든 깨작깨작 말고 뚝뚝 떨어진 동백꽃처럼 온몸으로 순정을 불살라라 하는 몸짓이다. 부산은 동백꽃 도시답게 여기저기 애기동백꽃이 만발해 추위와 코로나19에 움츠러든 사람들을 위로한다. 동해선 재송역 부근의 애기동백은 나무 전체가 빨갛다. 동해선 거제해맞이역 부근 고가철로 아래 공원에서도 애기동백 선홍빛이 출근길 시민들을 맞는다. 동백섬의 토종 동백꽃은 보기 힘드니 아쉽다.얼마 전 냉장고를 정리하다 아래 칸의 검은 비닐봉지를 발견했다. 참기름 같은 액체가 담겨있는 소주병이 들어있다. 냄새를 맡아보니 동백기름이었다.“철민아, 이거 동백기름이다. 머리에 바르면 머리에 윤기가 반들반들하단다. 각시 갖다줘라.” “어머니도 참, 요즘 세상에 이런 거 누가 머리에 바른답니까.”7년 전쯤 어머님이 싸주신 동백기름을 그대로 냉장고에 넣어두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머님은 생전에 “나는 꽃을 좋아하니 내 무덤가에는
아파트 단상
지철민 관리사무소장/부산 거제동월드메르디앙아파트
호수 1255
2022.03.0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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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어머니를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어제는 한 입주민의 며느리가 음료수 한 박스를 가져왔는데, 오늘은 친딸이 귤 한 박스를 관리사무소로 가져왔다. 먹어서 맛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이 시어머니를, 그리고 자기 어머니를 많이 아끼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했다. 어머니는 80세 초반이신데 상당히 활동적이고 예의가 깍듯하셨다. 아파트 단지를 순찰할 때 마주치면 “소장님, 수고 많으십니다”라고 외친다. 학교에 처음 가서 인사 교육을 받은 초등학생처럼 반듯하게 인사하는 분이셨다. 그런 분이 치매가 조금씩 오더니, 허리 수술을 받은 후에는 치매 증세가 심해져서 혼자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세대 안에서만 생활하신다.어쩌다 한 번 밖으로 나오시면 아파트 복도에서 혹은 승강기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방향을 못 정하고 망설이신다. 그렇게 배회하는 것을 다른 입주민이 보고 관리사무소로 연락해줘서 관리직원이 집에 모셔다드렸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며느리와 딸이 하루걸러 음료수와 귤을 관리사무소로 가져온 것이다. “저희가 잘 보살피겠지만, 혹시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있으면 잘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음료수는 관리직원들에게 돌리고, 귤은 따로 챙겨 노인정에 갔다. 어
아파트 단상
박종식 주택관리사
호수 1254
2022.02.24 13:17